다음글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글판` 1980년 12월호에 실린 `사막의 기적, 포로들이 세운 대학`을 정리한 것입니다. 상당히 오래된 글이지만 평범에서 "비범"으로의 시작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이 "시점"은 인생이라는 선분을 이루는 한 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점 한점이 모여서 선분을 이루듯 인생은 선분간의 도약이 아니라 선분내의 연속적인 "점"을 이루어 가는 것임을 새삼 느끼는 것이죠.

그 선분이 직선이 될지, 곡선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닐까요?

[전문]


철도는 서 알제리사막의 말라붙은 염분호수 `쇼테쉬 쉐르기`에서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6월, 그곳에 30명의 독일군 장교들이 기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곧 트럭에 옮겨 태워졌고 트럭은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요새화 된 프랑스외인부대 병영인 `제리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400여명의 독일군 장교들이 전쟁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다.

트럭에 실려온 이들 30명의 독일군 장교 중에 22세의 `칼 간츠호른`이라는 중위가 끼어 있었다.

그는 바지와 셔츠바람에 포크와 스푼만을 들고 심문과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밤낮의 기온차이가 극심한 이 사막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빈대에 뜯기며 앞으로 4년을 보내리라는 것과 그 기간이 자기 생애에 가장 중요한 결실의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포로수용소는 축구장 넓이 만한 부지에 24동의 막사가 있었고 막사 안의 가구라고는 2층으로 된 나무침대와 건초를 넣은 침낭뿐이었다.

고참 포로들은 신입자를 맞아들이기 바쁘게 권태를 느끼지 못하도록 규칙적인 일과에 몰아 넣고서는 몇 가지 교과과정의 공부를 시켰다. 간츠호른 중위는 두명의 고등학교 교사가 가르치는 영어,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어의 강의를 들었다. 그들은 둘이서 12개가 넘는 언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간츠호른이 배속된 대대의 대대장인 `폴 포메`소령과 몇몇 고참 장교들은 언어 교육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젊은 장교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조국을 재건하는데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늘 되풀이했다. 수용소밖에 나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할 처지라면 수용소 안에 대학을 하나 세우면 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프랑스군 당국자들은 그런 착상을 눈감아 주었다. 포로들이 공부에 몰두하면 탈주나 폭동을 모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간츠호른이 도착한 지 몇 주일 안에 민간인 시절 쾰른시 치안판사였던 `한스 뷔르거스`박사(소령) 주도 하에 `야전대학`이 세워졌다. 박사와 학식있는 동려들은 포로들 중에서 온갖 전문가들을 총동원했다.

포로들 가운데는 역사학자, 법률가, 수학자, 과학자, 건축가, 언어학자 등이 있었으며 그들의 지식은 핵물리학에서 산스크리트어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었다. 심지어 간츠호른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포로들도 전자공학이나 음악 같은 분야에 있어서 남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4개학과가 편성됐다. 전기공학을 배우고 싶었던 간츠호른은 물리학과 수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자 자연과학과에 등록했다. 그는 공부가 향상되자 수학과 전자공학 교수요원으로 뽑혔다.

`프란츠 아디스`란 포로 학생은 1942년 부상으로 튀빙겐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시험을 치렀었다. 그는 당시 법학에 소질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제리빌 포로대학 법과에 들어가 전직 지방법원 판사 `에른스트 라이스`박사를 비롯한 4명의 법학자 밑에서 민법과 행정법을 공부했다.

`쿠르트 말슈테트`는 건축가가 되려던, 거의 포기해버린 옛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건축 설계과에 등록한 후 삭소니 출신 건축가인 `칼 담스`밑에서 공부했다. 담스의 지도를 받은 포로 학생들은 손수 나무조각으로 자와 삼각자를 만들고 4개학과 학생들이 사용할 책상과 의자까지 만들었다.

어떤 포로들은 일반의나 치과의사가 되려고 의과에 등록했으며 전문과목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비공식적인 학과인 제5학과에 등록했다. 이들중 한명인 `칼 하인츠 메르체니히`는 유리창 디자인을 배우고 화음(和音)과 대위법(對位法)을 배웠으며 정치학과 비교종교학 강의까지 들었다.

제리빌 포로수용소 야전대학 학생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를 부족한 대로 최대한 활용하면서 공부해야 했다. 그들은 수용소 구내의 돌벽 판판한 곳을 골라 칠판으로 삼고 벽돌이나 목탄조각을 분필로 썼다. 또한 포장지나 화장지, 담배갑, 마분지상자 등을 모아다가 공책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따금 집에서 오는 편지는 검열 때문에 종이의 한면만 쓰게 돼있어 다른면은 임시변통의 공책장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중으로 환영받았다.

학생들은 배운 지식을 외어버렸으며 간츠호른이 수용소내로 몰래 들여온 지우개 하나를 돌려가며 사용해 종이를 `재생`시키곤 했다. 또한 기술적인 도형은 막대기로 모래위에 그리기도 했다.

학생들은 학습용 물자를 뒤져 찾아내기도 하고 슬쩍 훔치기도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의 하루 일과는 아침 8시 30분의 아침 점호 직후에 시작됐으며 오전 수업은 알제리산 막포도주를 양철컵으로 한잔씩 주는 이 수용소의 유일한 `환대` 시간인 11시 30분까지 계속됐다. 이어 점심때가 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희멀건 스튜 한 그릇씩을 배급받았다.

스튜는 농사철에 따라 콩과 토마토, 호박, 양배추가 들어가 1년에 4번씩 바뀌었으나 그 맛은 늘 마찬가지였다. 그 외의 일상 식단은 볶은 대추야자씨로 만든 모닝커피와 포로 1인당 150g의 마른 빵 뿐이었다.

점심 후 대낮의 햇볕이 무자비하게 내리 쪼이면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포로들은 보통 막사에서 낮잠을 잤다. 수업은 오후 3시 30분에 다시 시작되어 저녁 6시의 일석점호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생일축하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저녁6시부터 9시까지 각종 놀이가 허락됐지만 그 후에는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음은 일체 금지되었다.

식량외에 제리빌의 야전대학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교과서였다. 1943년 말 몇 명의 국제적십자사 시찰단이 YMCA대표 한 명과 같이 수용소를 방문했다. 이들은 포로들이 먹고사는 양식 다음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지적인 양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1944년의 어느 날 이들의 꿈이 실현되었다. 프랑스군 트럭들이 멀리 미국에서 보낸 전혀 예기치 못한 선물을 싣고 왔다. 대학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기본 교재로 비치되는, 독일어로 된 1000여권의 책들이었다.

포로들의 향학열에 감명 받은 미국 YMCA대표가 미국 도서관들에서 책을 모아 뉴욕에서 사진 오프세트로 복사 한 후 문고판식 표지를 붙여 제본하여 대서양 건너의 적군 포로들에게 부쳐 주었던 것이다.

"이 책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칼 간츠호른의 회상이다.

"우리 손에 읽을 책을 쥐게 되다니! 더욱이 이전엔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 한가운데서."

새로이 더 높은 수준의 학습계획이 세워졌다. 한 교재를 같이 보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10여명씩이나 되었다. 몇주일 후 적십자사에서 앞서 도착한 양에 필적하는 분량의 독일책들을 중립국인 스페인을 경유해 보내왔다.

미국 YMCA와 국제적십자사의 이와 같은 관대한 처사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44년 어느 날 트럭이 트럼본 1개와 색서폰 2개, 트럼펫 2개, 클라리넷 2개, 그리고 여러 개의 타악기를 실어다 주었다. 앞서 수용소에 있던 4개의 낡은 악기는 잘 닦여 있었다. 그래서 이제 포로 대학은 12개의 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를 갖게되었다. 포로들은 악기당 2~3명이 매달려 연습을 했다.

어릴 때 바이올린의 신동이라 불렸던 `볼프강 호프만`중위는 야심이 생겼다. 그는 2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와 플루트를 위한 5중주를 작곡한 뒤 2편의 짧은 오페라를 완성했는데 그중 하나는 10일 밤이나 계속 성공리에 연주되었다. 어느 날 밤 작곡가에 지휘자, 연출가를 겸한 호프만이 20번째 무대 앞으로 불려나와 답례 인사를 하자 프랑스 경비병 중 가장 거친 사나이 하나가 호프만을 감격스레 덥석 끌어안고 양볼에 입맞추며 소리쳤다.

"음악에 국경은 없다!"

히틀러가 죽고 전쟁이 끝나자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제리빌에서는 아직 송환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포로들에겐 힘든 시기였다. 간츠호른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제리빌 수용소를 영원히 못 떠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오직 공부에 몰두함으로써 떨쳐버릴 수 있었다."

메르체니히는 이 사막대학이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속에서 대학을 세운다거나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 세상에 무언가를 이룩해 놓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의지는 결코 말살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계속 향상해 나가는 한 무엇이든 참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7년 6월 마침내 수천의 다른 독일군 포로들과 함께 제리빌의 포로들도 프랑스 여객선 `S.S. 파스퇴르`호에 타고 북아프리카에서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칼 간츠호른은 고향인 진델핑겐에 돌아갔는데 운좋게도 가족이 모두 살아있었고 집도 멀쩡했다. 그는 곧 3개의 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슈투트가르트에 정착했을 때 그는 대학 복구작업을 도우며 6주동안을 보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간츠호른은 친절한 수학과 주임교수와 면담 할 때 사막에서의 경험을 말하며 조심스럽게 간수해왔던 포장지공책을 보여 주었다. 주임교수는 퍽 감명을 받아 이학사(理學士)후보생들이 그해 봄에 치른 수학시험 문제지를 찾아내어 간츠호른에게 주면서 다음날 가져오라고 했다.

간츠호른은 그 문제지와 밤새워 씨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냈다. 뭔가 빠뜨리지 않았나 하고 여러 차례 깜짝 놀라 깨지 않았다면 잠을 푸근히 잘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 과주임은 간츠호른이 사하라 사막의 포로수용소에서 학위를 받기에 충분한 공부를 했음을 확인했다. 6개월 후 간츠호른은 다른 필수 과정을 마친 다음 물리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당국은 간츠호른의 첫 시험성적이 나오자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그의 포로수용소 동료 6명에게도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그들의 점수는 모두 우수했다.

한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같이 우수한 학생들이 한꺼번에 대학에 온 것은 내 평생에 처음있는 일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런 열성적인 학생들을 본 일이 없다."

독일의 다른 지방의 교수들도 제리빌 포로대학 출신들에 대해 같은 찬사를 보냈다.

오늘날 제리빌 포로대학 졸업생 명부는 독일 명사록이 되었다.

칼 간츠호른은 서독 IBM사의 이사이며 볼프강 호프만 교수는 유명한 만하임의 쿠르프팰치쉐 실내악단 지휘자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회사 중역, 치과의사, 작가, 교사, 시장, 판사 등 주요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칼 하인츠 메르체니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들의 성공은 우리가 포로수용소에서부터 고이 간직하고 영원히 지켜나간 정열과 의지력의 소산이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배운다는 의지에 확고부동했고 그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도 건실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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