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 2002-11-29 17: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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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1-04-21
히딩크가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고 해도 우리 나라가 월드컵 8강에 진출할 확률은 30%도
안될 것이다.

[조선일보] 2001-08-22
<패배할 때마다 말 바꾸는 히딩크>

[조선일보] 2002-03-05
<더욱 황당한 것은 말을 교묘하게 바꿔가며 "6월 목표로 세운 계획에 맞춰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히딩크의 태도다. 물론 그의 말대로 우리에겐 월드컵 무대가 무
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최근 히딩크 감독의 `말 바꾸기`는 그에대한 신뢰를 무너뜨
리고 있다.
한국 축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언어의 마술사`가 아니라 능력 있는 축구지도자다.>

<조선일보의 IMF 환란 책임>- IMF 이틀 전까지 "외환위기 없다" 되풀이 호언!
한국의 외환위기에 있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일보이다. 그들은 사태가 발생하기 이틀 전까지도 외환위기는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신문이다.
그래 놓고선 나중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뒤 모든 책임을 자신 외의 사람들에게 돌려 벼렸다.
우리의 외환 위기는 97년 초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1월7일 현대그룹 산하 현대경제산하연구원이 "한국의 경제상황이 94년 외환위기를 겪은 멕시코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외환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 밝혔음에도 언론들은 그리 큰 문제를 삼지 않았었다.
조선일보는 97년 3월8일과 9월18일자 지면에서도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캉드쉬 IMF 총재 조선일보와 회견" 이라는 글을 내보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8월22일자 1면에서는 "한국성장률 더 높아진다" 라는 기사도 내보냈다.
결정적으로 11월3일자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긴급기사`로 전 세계에 타전했는데도, 조선일보는11월8일자 지면에서 "근거없는 추측보도"로 맞대응을 했다. 11월10일자 사설에서는 "외국의 한국경제 때리기"라는 글도 내보냈었다.
조선일보가 경제청문회에 서게 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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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99년 10월4일 월요일 사설에 관하여...
99년 중앙일보 세무조사 때는 `그 누구도 법앞에 평등하며 어떤 권력도 탈세로부터 면책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라고 당당하게 사설을 썼던 조선일보가 2년이 지난2001
년 언론사 세무조사 때는 자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니 `남이 하면 불
륜이고 내가하면 로맨스인가?

[전두환 장군 만만세!]
"광주난동 극복 새시대 기수" "의리, 정직의 지도자....군 개입은 당연" "12.12는 대승적 윤
리" "전씨집권 세시대" 조선일보는 12.12쿠테타를 시작으로 민주화의 봄을 피로 물들인 전
두환을 이렇게 찬양했다.

[권언유착,5공 최대의 수혜자는 조선일보]
1980년 매출액에 있어서 조선일보는 161억원으로 동아일보(265억원)와 한국일보(217억원)에 비해 한참 뒤쳐지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하의 5 공화국을 지니고 난 88년에 이르러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914억원으로 동아일보(885억원)와 한국일보(713억원)를 압도하게 된다. 현제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으로 군림하게 된 최대의 배경이 바로 5공 시절의 특혜에 있었다.
월간지의 경우에서도 조선일보는 5공으로 부터 특혜를 받았다.
월간중앙이 폐간되던 무렵인 1980년 4월 조선일보사는 월간조선을 창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5공시절의 월간지 시장은 기존의 신동아와 월간조선,정경문화(경향신문사 발행)가 3파전을 벌이게 된다.
흔히 조선일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조선일보의 성장을 가리켜 영업의 탁월함을 이야기 한다.
하긴 권력에 대해 아첨하는 실력도 한편으론 탁월한 영업이라 할수 있겠다.
우리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가 하는게 아닐까? 시민을 총깔로 때려죽이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 일당에 대한 끝없는 아첨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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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육십년이 지난 글이지만 읽는이로 하여금 낯뜨겁게 하는 기사입니다.

품파러 모은돈을
황군위문금으로
제생원아동들의 성심 듯는사람마다 감격해

요사이 시국이 매우 중대한 것을 따라 여러방면으로 모다 정성을 다해서 오는바 이번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업는 제생원의 어린이들이 총후의 적성을 다해서 관계되는 각 방면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엿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드러면 제생원 의원아 륙십여명은 그 경영
하는 농장 갓가히 경춘철도의 건설공사가 잇는 때문에 농사를 하는 틈틈으로 그 철도공사를
거드러서 동 회사로부터 바든 보수금 십이원 륙십전을 지난 삼일날 조선군사 후원연맹에 보
내어 황군위문금으로 헌금한 갸륵한 사실이 잇섯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압흐로더 일치협
력해서 이번에는 국방비를 헌금 하겟세요" 하고 모두 원기에 넘치면서 일을한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1939-4-29 사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번창한 이 시절에 다시한번 천장가절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
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바,
실로 성황성공 同慶동하 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한
은(恩) 과 광대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봉건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일까? 아니다. 조선일보의 1939년 4월 29일자 사설이
다.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쓴 이 축하문은 신문의 사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극심한 `일왕찬가`다. 스스로를 낮추는 어미 `옵`자를 남발하며 비굴하게 몸을
굽힌 이 글은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하고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 라하며 `충성`
도 양에 차지 않은 듯 `극충극성` 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 이라고 까지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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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1937년이래 해마다 1월1일자 1면에 일왕 히로히토부부의 사진과 찬양기사를 싣는 것도 부족해 합의 폐간되던 해인 40년 1월1일자에서는 아예 "조선일보"라는 제호를 밑으로 내리고 일장기를 올려 싣는 "파격"을 보였다.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공격적 경영전략으로 동아일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두 신문과 사주의 경쟁이 그치지 않고 친일행위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 무한경쟁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극에 달한다.
일제가 전쟁선전기구로 만든 각종 단체의 얼굴마담을 자처한 방응모는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침략행위가 광기로 바뀌는 1941년에는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의 위원으로 참여한다. 41년 10월에 친일단체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김성수는 이 단체의 감사로, 방응모는 이사로 참여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첨병노릇을 한 단체다.
1940년 일제가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합의폐간하자 방응모는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을 본격적인 친일잡지로 개편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창간기념 특집으로 `조선일보 사장열전`을 연재하면서 `개초 방응모` 편에서 "폐간 후 계초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가 친일잡지를 발행하고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의 전신) 설립자로서 지식인이었던 김성수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매일신보의 연속물(`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 대의에 죽을 때-황민됨의 책무크다`를 기고하는등 여러편의 극렬한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편에서는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 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 고......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 성전에 치참치 못하고 대동아 신 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써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을 찾을수 없게 될 것이다" 라며 젊은이들을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떠 밀고 있다. 방응모나 김성수나 총알받이가 되려면 자신들이나 될 일이지 자신들은 호위호식하면서 애꿎은 젊은이를 `역사` 와 `존명`을 들먹이며 전장에 나가서 일제를 위해 죽으라고 선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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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자신이 운영하는 자매지 <소년조선일보>를 통하여 조선 어린이에 대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보도를 하였다.
조선일보는 <소년조선일보>를 통하여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하루 앞둔 1940년 4월 28일 보도, `황후폐하옵께서 상병에게 화초를 어하사` 에서 "황후폐하옵께서는 출전해서 다치고 온 부상병을 염려하옵시고 그들에게 황송하옵게도 신숙어원 에서 기르옵신 화초씨를 내리셨습니다. 씨앗은 나팔꽃, 공작꽃 같은 것 외에 마흔 몇 가지이고 또 `달리아` 같은 구근도 십여종 이라 합니다. 어 인자하심에 감격해서 삼도군사 보호원 부총재는 지난 십구일에 참내 씨앗과 구근을 배수하고 각 요양소에 광영을 분배하였다 합니다"라고 보도하여 순진무구한 조선 어린이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 선전하는 보도를 하였다.
조선일보의 위와같은 보도는 조선 어린이에 대해서도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또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도록 선동하는 것으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제와 그 시책에 적극 협력한 악질적인 반 민족적 언론행위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는가?]
독립운동가 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이들은 말과 글을 동원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조선의 물자를 일제에 바치도록 선동했던 신문이,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버젖이 민족지로 표기 되어 있고 그 신문을 찍어낸 윤전기가 독립기념관에 민족지를 인쇄한 기계라고 전시되어 있는나라, 이런 나라에 살면서 과연 우리가 일본인에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개정하 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코웃음 치리라...."너희 교과서나 제대로 쓰라고......"



=====우리가 정녕 기억해야 할 것은 일제에 항거하다 폐간된 언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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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프랑스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해방 후 한국의 반민특위 활동과 비교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단죄다. 반민특위는 무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의 과거청산은 투명하고 가차없이 진행돼 민족반역자들을 뿌리뽑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일간지 파리 특파원으로 20년을 프랑스에서 보낸 주섭일(62.<내일신문>상임고문) 씨가 지은 <프랑스의 대숙청>(중심 펴냄)은 반나치 항전세력의 나치협력자 처단과정 전말을 담은 저작이다.
<프랑스의 대숙청>은 프랑스의 전쟁영웅 -샤를 드골(1890-1970)을 중심인물로 놓고 사건의 시작과 끝을 가로지른다. 드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철저하게 `나라 바로 세우기` 과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기본관점이기 때문이다. 1940년 5월 10일 히틀러 군대는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전선을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독일군의 파죽지세 공격에 맥없이 당하던 프랑스의 레이노 정부는 6월 16일 총사직한다. 프랑스는 항전 파와 휴전 파로 갈린다. 부총리였던 필립 페뎅 원수는 독일과 휴전한 뒤 비쉬에 나치의 괴뢰정부를 세운다. 국방차관으로 전선을 지휘하던 드골 장군은 이에 맞서 런던에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창설한다. 해외의 드골은 국내 레지스탕스 단체들의 지지를 받으며 독일에 대한 항전을 계속한 반면, 페탱 정부는 15만여 명의 프랑스인 이 나치에 총살당하고 1백여만 명이 나치의 군수공장 또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돼 죽어 가는 것을 방치하거나 거들었다.
44년 8월 파리 해방직후 귀국한 드골은 `정의의 법정`을 세우고 즉각 나치 부역자 단죄작업을 개시했다. "국가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는 것이 드골의 신념이었다. 대숙청의 오랏줄에 묶여 99만여 명의 나치 협력자가 투옥됐고, 6763명에게 사형, 2777명에게 종신강제 노동형, 3만 6천 7백여 명에게 유기징역형, 4만 8400여명에게 부역죄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즉결처분과 인민재판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1만-10만 명(추정치)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대숙청>은 페탱을 국가원수에서 민족반역자로 몰락시킨 재판 과정에 긴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지면을 지식인, 특히 언론인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중계하는데 바친다. 드골은 파리 해방직후 나치 협력 언론인을 최고재판소의 첫 심판대 위에 올렸다. 재판소는 신념에 따라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언론인보다 독일이 강자로 등장하자 나치선전원으로 전락한 `매춘언론인`을 더욱 가혹하게 다스렸다. 드골은 뒷날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제일먼저 죄를 물었다" 고 밝혔다. 언론인과 함께 나치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9백여 개 신문, 잡지 가운데 6백 49개가 폐간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드골이 이처럼 반역세력과 단호하게 싸울수 있었던 것은 좌파에서 우파까지 저항지식인들의 전폭적인 뒷받침 덕이었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들 가운데서 유독 돋보였다. 그는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을 비판하며, 반 나치 투쟁때 창간한 신문<전투>를 통해 연일 정의의 심판을 외쳤다. 다수가 카뮈편을 들었다. 드골은 이들의 힘을 얻고, 부역자본가의 기업체를 몰수해 국유화하고 관계와 정계의 썩은 피를 남김없이 제거했다. 이 결과 45년 총선에서 당선자의 85%가 정치신인으로 채워졌고, 레지스탕스 투사 출신의원이 80%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지은이는 프랑스 역사를 써가면서 자주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
"한국은 프랑스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해산시켜 버림으로써 친일세력에 대한 응징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족반역자들을 독립국가의 지배세력으로 또 다시 복귀시켜 주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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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반칙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조선일보는 왜 이리 나쁜 짓을 저지를까? 조선일보에 관해 궁금해하고 그 나쁜 짓들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지?` 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가 그 답을 복잡한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용기가 없는 자는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조선일보는 과거 자신들의 죄상을 그대로 넘어갔다. 사실이 밝혀져 궁지에 몰려도 합리화와 침묵으로 비켜갔던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조선일보가 사과 한마디 잘 했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살다보면 다음과 같은 찝찔한 경험을 가지게 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거짓말을 한다. 들통이 나면 적당히 감춘다. 거짓말을 위해 또 거짓말을 한다. 어떤 부분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합리화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또 낳고 결국 그 자신은 자신의 거짓말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강력히 자신의 옳음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조선일보의 참담한 꼴은 딱 그 꼴이다. 그들은 현재 죄의식조차 없다. 자신들이 항일민족지였으며,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회문제가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조선일보가 나쁩니다` 라고 얘기 드리면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굳이 문제를 헝클어뜨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 마음속의 비겁함이 겪는 일들과 조선일보의 역사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칙하는 사회가 오면,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 손해를 본다. 적어도 이 세상이 깨끗하고, 또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면, 반칙을 해대는 세력은 청산되어야 한다. 진정 정의를 믿는 사람이라면 조선일보를 절독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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