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자들 사이에서는 `독일병(病)`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독일병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칭송받던 독일 경제를 `성장률 0%`로 주저앉혔기때문입니다 .
지금은 영국병.일본병보다 더 치유하기 힘든 난치병으로 지목받는 판이라 합니다.
독일병을 독일인의 시각에서 해부한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잘되는 세상`(디르크 막스아이너 외 저, 한국경제신문사)은 `한국병`으로 바꿔 읽어도 별로 어색하 지 않습니다.
`괴테의 메피스토 법칙`이란 부제가 암시하듯 `좋은 의도에 나쁜 결과, 나쁜 의 도에 좋은 결과`를 낳은 무수한 사례들이 바로 `지금 여기(한국)에서` 목격되고 있으니 민경국 교수님의 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문]
민경국 /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1. 독일병: 高실업-低성장
全세계를 압도할 정도의 번영을 구가해온, 그래서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던 獨逸경제는 신뢰를 상실한 듯하다. 말하자면 맛이 가버린 듯 하다는 것이다. 부잣집은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는 것처럼, 지금 독일이 먹고사는 것은 망한 부잣집에 남아있는 것을 먹고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독일은 오래전부터 성장률이 유럽 국가 가운데 하위권에 속하고 있다.
2001년에는 겨우 0.6%의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작년 성장률은 0.2%이었다. 금년에도 별로 큰 기대를 걸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낙관적으로 예측한다고 해도 1%도 못 미친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업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금년 2월 현재 11.2%의 실업률이다. 450만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작년에는 10.3%, 2001년에는 10.4 %에 달했다.
오늘날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동비용 국가이다. 2000년 시간당 노동비용이 25.81유로(서독)이다.(미국은 21.81유로, 영국은 18.80유로) 그에 비해서 생산성은 프랑스나 영국 그리고 미국보다도 낮다. 미국의 생산성보다 17%나 낮다.
독일에 가 본 사람들이 맨 처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독일에서 전화를 가설하기 위해서는 4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을 설치하는 데도 3주나 걸린다. 독일서적을 독일 국내에서 구입하는 데만도 2주일이 걸린다. 왜 그런가? 노동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신규고용을 회피한 결과 때문이다.
장기 실업률, 수출입, 노동비용, 생산성, 투자비율 등을 고려하여 독일의 유명한 베텔스만 연구소가 2002년 하반기에 발표한 나라별 비교 연구를 보면 세계의 주요 공업국가 21개국 중 독일은 16위이다. 독일경제는 생산성이 임금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고비용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런 고비용에 발목이 잡혀 低성장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지표들 그리고 다른 모든 지표들을 보면, “라인강의 기적은 사라지고 유럽경제의 환자가 되어버렸다”고 英國 《파이낸셜 타임즈》가 최근 말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독일 경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로서 세계 경제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라크 사태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들도 있고 지정학적 위험, 테러리즘의 위협, 석유 값의 인상, 회계 부정 사건과 같은 요인들이 투자위축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또는 최근 《비즈니스위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통일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진단들은 독일 경제의 어려움의 원인을 외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독일경제 자체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외부 원인이 사라지면 다시 과거의 고도 성장을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反戰과 反美를 통해 전쟁을 막고 테러의 위협을 억제하면서 참고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그 탓을 꼭 외부로 돌리는 사고의 유형이 左派의 사고 유형이다.
집권 여당인 사회민주당 사람들과 좌파 지식인들도 예외없이 이런 입장이다.
그러니까 하도 답답하여 참다못해 독일 연방은행이 금년 3월초에 〈위기의 탈출Wege aus der Krise〉이라는 20쪽의 아주 짧은 보고서에서 독일정부에게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독일 경제의 성장장애를 결코 단기적인 성격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고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성장장애물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강력한 再분배 지향적인 사회보장제도, 노동시장의 경직성, 기업에 대한 과도한 관료적 규제 등을 들고 있다. 독일 경제의 低성장 구조의 원인이 결코 단기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은 과거 50년간의 성장 추세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971년 이래로 성장률이 이전에 비해서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그 하락 추세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업률도 급격히 증가해 왔다. 따라서 독일 경제의 低성장 高실업의 원인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장애물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입증해 주는 지표가 성장률과 실업률만이 아니다. 생산성 하락 추세와 노동비용의 증가추세도 이와 비슷하다.
성장 장애물이 1970년 이후 거의 30년, 말하자면 1세대 동안 장기적으로 누적된 것이다. 그러니까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독일의 低성장-高실업 그리고 低효율-高비용이라는 구조적인 경제위기는 시간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또 최근에 독일의 정보산업체가 연구 발표한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독일이 미국 수준의 정보산업을 따라 가는 데는 3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독일 경제는 1970년 이전의 경제와는 전혀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 원인은 독일 중앙은행이 지적하고 있듯이 구조적이다. 그 구조적인 원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 나라의 지속가능한 성장잠재력을 결정하는 열쇠의 결함이다. 이 결함은 노동부문(노동시장) 경직성, 교육부문(인적자본) 낙후성, 역동적이지 못한 기업부문(기업의 지배구조)이다. 이 세 부문의 결함에다가 복지국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취해진 각종 복지정책이 독일의 성장잠재력을 해치고 말았다.
2. 노동시장
독일이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左派 지식인들은 물론이거니와 全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독일의 노동시장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노동조합의 힘이 강력하다는 뜻이고, 또 이로 인하여 노임이나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이 유연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세계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7개국의 노동시장 자유도를 평가한 미국의 격주간 경제지 《포브스인터넷》의 최근 판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의무휴가일수, 노조활동범위, 장기실업률, 노동법 등의 네 가지 기준을 토대로 하여 작성한 결과를 보면, 독일(30.49)은 17개국 가운데 이탈리아(36.40) 다음으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미국(4.55)과 캐나다(4.55)가 단연 우세하다.
산별노조는 제2의 입법기관
이런 경직성을 야기한 근본적인 이유는 노동자의 힘의 균형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에서 도입된 노동관련법 때문이다. 독일에서 산업별 단체협약이 없이 노임과 노동조건이 결정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단체협약은 강제규정으로서 산업 내의 모든 개별기업과 노동자들을 구속한다(단체협약법). 그러니까 독일 노동조합은 연방의회와 나란히 제2의 입법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단체협약의 강제성과 그리고 노동법원의 역할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경직성은 단체협약의 강제 규정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다.1) 이 산별 단체협약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단체협약에서 명시적으로 허용한 것만이 기업단위의 노사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의 제각기 고유한 서로 다른 경제적 사정을, 또는 노동자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경제적 사정과 노동 취향 등을 고려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독일의 노사관계에서 집단주의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조합이 개인들보다 더 우선한다. 더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집단주의는 독일 기본법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별 단체협약의 위반은 독일 기본법 제9조 3항이 규정한 기본권 또는 인권으로서 연립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최선의 대우 원칙principle of the most favoured treatment’이 그것이다. 기업 단위에서 개별 노동자들과 사용자 간에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고 해도 단체협약보다 “객관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유리하지 않으면 그 만장일치 합의는 불법무효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더 유익하냐”의 여부는 개별 노동자와 사용자들의 주관적 판단과 그 합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노동법원의 판결에 맡긴다는 점이다.
연방노동재판소의 상식에 어긋난 판결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아 납득하기 어려운, 그래서 유명해진 소송사건 하나를 보자. 1995년 인쇄산업의 단체협약에서 주당 근로시간을 35시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단체협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노조가 제기한 소송사건이다. 인쇄산업의 어느 기업이 이 단체협약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다. 35시간을 지키면 재정난에 빠질 것이 뻔했다. 이 사업주가 자신의 종업원들에게 무임금으로 두 시간 더 노동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종업원들 중 95%가 찬성했다.
반대한 종업원을 제외하고 이 합의대로 실행했다. 그런데 인쇄산업 노조가 단체협약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연방노동재판소의 괴상한 판결이다. 그 합의가 산별 단체협약보다 노동자들을 “객관적으로” 더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인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연방노동법원은 일자리보장과 두 시간 노동시간 연장은 “객관적으로 비교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어진 노동시간에 노임을 인상하던가, 아니면 주어진 노임에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객관적으로” 노동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얼마나 독일법이 개인주의-주관주의, 그리고 이에 따른 당사자들 간의 합의를 무시해 버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집단협약의 강제조항, 최선의 우대원칙, 그리고 기업차원의 협상 금지조항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이에 따른 필연적인 실업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런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1970년대 이후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독일 사회의 모든 분야가 급격하게 左傾화된 탓이다.
1968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좌파 세력들이 등장하여 학생들, 급격한 좌파 지식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노동조합을 지원했고, 이에 강력한 힘을 얻은 노동조합은 언제나 시장 노임보다 높은 단체노임 협약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런 노조의 힘과 협상 근성은 꾸준히 누적되어 오늘날 독일의 질병을 야기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70년 이전에는 노조의 힘도 미약했고 단체협약 노임도 시장노임보다 낮았다. 이것이 1970년대 이전 독일의 완전고용과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을 가져온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독일의 노동조합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는 정당들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선거 쟁점으로 만드는 것을 선거전략상 일종의 터부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정책은 정치적인 자살행위가 될 만큼 노동조합의 힘은 하늘을 찌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립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두 개의 가장 큰 정당으로서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우선 大聯政Grosskoalition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난센스가 아니다.
노동법원이 필요한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방해하는 또다른 요인 중 하나는 노동문제를 전담하는 노동법원의 역할이다. 노동법원은 3심제도로 되어있다. 지방노동법원, 州노동법원, 그리고 연방노동법원이 그것이다.
소송비용이 아주 싸다.(약 500유로 정도) 또 대부분 노동조합이 그 비용을 부담한다. 소송비용이 낮기 때문에 이 법원을 이용하기가 아주 쉽다. 그러니까 노동법원은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이상적인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독일에 관심이 있는 좌파라면 부러워 할 만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철저히 노동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연방법원에서 소송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판결은 연방의회가 정하는 법률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연방법원의 판결들은 연방법원의 도움으로 노동조합이 제정한 법적 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제2의 입법부로서 노동조합은 연방노동법원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판결들 대부분이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 결정은 개별적인 노동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법원은 그 판결이 노동시장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비효율적인 법원판결과 이에 따른 법적 틀이 누적되어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더욱 강화된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별도의 노동재판소가 필요한가? 노동재판의 3심 제도가 과연 적합한가? 별도의 노동재판소가 없는 나라도 많다. 2심제도만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있다. 그렇다고 정의의 실현이 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최고재판소로서 연방노동재판소가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여기고 있다. 노동재판만이 아니라 모든 재판을 3심 제도로 하고 있는 것은 3심제도야말로 정의의 실현을 위한 효과적인 제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잘못이다.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 판결은 진리나 마찬가지로 취급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판결에 대한 불복이나 또는 다른 재판소의 재판관들에 의한 견제와 검증, 테스트로부터 전적으로 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의 추구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독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제도가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과 판결이다.
아무도 이 해석과 판결을 번복하고 견제하고 검증하고 불복할 수 없다.
해석과 판결은 구속력을 가진 법이기 때문에 최고재판소(헌법재판소)의 판결과 해석은 법 생산의 독점체제와 동일하다. 이런 독점은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판결과 해석의 오류를 밝혀내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최고재판소의 존재 때문에 법 규칙들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과 개선과정이 방해된다. 법의 발전과 진화가 차단된다. 20세기 위대한 자유의 대변자였던 하이에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적절한 규칙을 찾아내기 위한 “발견적 절차”가 배제된다.
2심제도가 오히려 정의의 실현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州노동법원들은 제각기 주어진 의회에서 정한 입법의 범위 내에서 적절한 규칙을 찾아내고, 또 서로 찾아낸 규칙들을 오류를 찾아내고 테스트할 수 있다. 이 테스트 과정 속에서 꾸준히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로써 규범들이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이 재판관들의 이런 상호작용은 규칙의 발견적 절차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연방노동법원이 추가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이런 발견적 절차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작동할 발견적 절차를 도중에서 차단하는 것과 동일하다.
정부는 실업자의 아버지
노동조합이나 노동법원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실업문제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책임이 있다면 노동조합이나 노동법원은 경제 전체적인 맥락에서 하나의 사건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경제의 전체적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에게 고용을 고려하여 노임정책을 취하라고 도덕적으로 호소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한쪽에서는 회사의 도산으로 실업자들이 가방을 들고 회사 문을 나서는데, 다른 쪽에서는 노임인상,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한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근성이다. 독일 노동조합의 파업은 비교적 온건하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과도하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노임인상이 대표적이다. 이런 요구는 기존의 실업자나 다른 그룹을 희생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이런 희생을 고려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노동조합과 노동법원의 과도한 행동에서 비롯된 비자발적 실업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이것은 정부의 몫이다. 더욱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과도한 행동을,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정부의 완전고용 과제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독일 시민들의 태도이다. 정부를 실업자의 아버지로 여긴다. 실업자를 먹여주고 입혀주며, 일자리를 보호해 주고, 일자리를 잃으면 일자리를 만들어준다. 이런 선량한 아버지가 수행해 온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 실업보험 지급에서 탈락된 자들을 위한 실업보조, 사회부조
― 해고금지법에 따라 “사회적으로 부당한” 해고는 불법이다. 사용자가 입증책임이 있다.
― 고용촉진 정책으로 교육 훈련비 지원, 일자리 창출에 대한 정부지원, 일자리 찾는 데에 대한 정부지원
우리가 이런 정책과 관련하여 주목하는 점은 이런 모든 정책은 높은 비용으로만 추진될 수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의 노동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0년 서독 제조업 분야의 시간당 노동비용은 25.81유로―노임 14.23, 부대비용 11.58―이다.〔프랑스 18.26 (9.46:8.80), 미국 22.81(15.57:6.24), 영국 18.8(13.11:
5.69)〕 노동비용 중 겨우 55.1%만이 노동자가 자유로이 사용할 소득이고 나머지는 실업, 연금, 의료 보험을 위한 사회보장 기여금이 44.9%이다.
이 기여금 중에서 40%는 조세에 의해 충당되고, 나머지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노동비용이 이렇게 높음에도 불구하고 노임의 유연성 또는 부대비용의 감소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조합의 저항 때문이다. 통화 통합으로 인하여 환율 정책과 이자율 정책은 독일 정부의 손에서 떠나 있으며, 유일한 정책은 노임의 유연성을 확립하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런 정책은 상상할 수 없다.
더욱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현재의 노임을 하락시키는 정책, 노임의 유연성을 인정하는 경제가 가장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는 독일 시민들의 태도이다. 기업주들이 필요한 그때그때마다 자유로이 해고한다는 것은 꿈 같은 얘기일 뿐이다. 해고의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소송을 대비할 준비부터 해야할 판이다.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실업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다. 그 하나가 노동비용에 대한 기업의 부담 때문에 신규채용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업수당, 사회부조금 등으로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얻으려는 의욕이 없다. 일자리가 좋지 않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사표를 쓰고 나온다. 그리고 실업수당을 받는다. 일하다가 업주와 싸우고 나와 실업수당을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자기책임 정신은 소멸되어 버렸다. 사회적 안전망網이 오히려 이 안전망을 이용하려는 실업자의 수를 증대시킬 뿐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를 더욱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노동윤리가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이나 부지런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나 무능한 사람 모두 똑같이 노동조합이 정한 노임을 받는다.
이런 인센티브 시스템에서 가장 합리적인 인간은 게으르고 능력없는 사람이다.
이런 인센티브 시스템은 교육에도 막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없다. 대학에서 열심히 연구할 의욕도 없다. 좋은 학과 좋은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 좋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젊은 청소년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의미가 없으니까 좋고 나쁜 학교도 생길 수가 없다. 중·고등학교의 차별화나 특수화도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3. 기업의 지배구조
독일기업인들은 모험심이 없고 의사결정이 보수적이다. 기업이 유연하지 못하다. 혁신이란 과거 상품들을 보완하는 정도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유럽시장에서 북미와 중남미시장, 미국 시장에서 그토록 역동적이고 정열적으로 장사하던 과거의 독일 기업은 지금 어디 갔단 말인가? 그 원인은 독일기업의 지배구조의 특징으로서 넓게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좁게는 노동자 경영참여 제도(1976년에 입법화되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제도는 한국 左派들이 소유와 경영의 분리원칙을 주장할 때마다 눈독을 들이고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어느 때든 도입하려고 하는 제도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좌파들이 소유와 경영의 엄격한 분리와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참여제도(넓게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적 사고의 전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주장한 것에서 비롯된다. 즉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최종단계이고, 주식회사의 생성 단계가 사적소유인 자본을 …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의 사회화 단계에 노동자나 그 밖의 이해 관계자를 투입하면 이제는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것이고 동시에 기업이 “국민기업”이 된다.
노동자 경영참여제도에서 노동자의 대표는 주주와 동등한 비율로 감사회를 구성한다. 노동자들의 대표자는 감사회를 통하여 주주들과 함께 기업의 재산과 이윤을 이용하고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계약에 의해 이는 획득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 과정을 통하여 빼앗은 것이다.
또한 주주에 속한 이윤을 법적으로 강제하여 공동의 재산으로 만드는 제도이다. 더구나 기업이윤의 반 이상은 배당할 수 없다는 증권법, 그리고 사내 유보이윤에 대한 조세 특혜와 이로 인한 기업 이윤의 사회화, 이어 기업의 사회화가 더욱 강화되었다.2) 더구나 노동자들은 의사 결정에 참여하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의 우매한 판결
따라서 이 제도는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과 그리고 기업의 자유주의 모델로서 계약모델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 제도를 도입할 당시 모든 정당들이 찬성을 했다. 사용자단체와 자유주의 학자들만이 반대했다. 사용자단체는 이 제도가 시장경제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제소했다. 헌법소원이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헌법 합치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전제하고 있는 기업모델이다. 이 모델은 분명히 자유주의적 계약모델, 즉 주주자본주의 모델이 아니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이다.
이런 합헌판결은 결국 자유주의의 계약모델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이런 판결은 정부의 투자 조종에 대한 헌법소송에서도 합헌판결을 내림으로써 시장경제의 자유경쟁 원리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열어놓은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독일 헌법재판소는 경제부문을 法治主義의 핵심적 요체인 독일 기본법 19조의 일반성 원칙의 적용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실질적 法治主義 원칙은 自由主義 원리, 그리고 시장경제 원리의 핵심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태도는 “질서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생겨난 결과이다.
오이켄-하이에크가 항상 강조했던 바와 같이, 시장경제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실질적 의미의 법치국가를 전제로 하고 또한 실질적 법치국가는 시장경제를 전제로 한다.
이 판결로써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경영참여 제도의 이념적 논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잘못된 판결은 오늘날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그 희생은 기업의 비효율성으로부터 야기한 독일 경제의 성장잠재력의 상실이다.
좌파지식인들의 독단
이 제도를 도입할 당시에 옹호자들은 “협조이론”을 가지고 이런 제도를 반대하는 소유권이론에 맞섰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해 관계자들(주주들은 물론 노동자, 공급자, 그리고 이 회사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의 구성원들)의 협조는 회사의 효율성을 증대하고, 이것이 회사가치의 극대화도 부수적으로 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흥미로운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즉 左派들이 주장하는바와 같이 정말로 효율적이라고 한다면 왜 자생적으로 이런 기업제도가 형성되지 않았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노동자의 경영참여제도가 도입되기 전(1976년)에 독일 법 중 어떤 법도 이런 제도의 도입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경영참여제도를 가진 기업형태가 생겨나지 않았다.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이 기업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효율적이고 따라서 이윤 증가 가능성이 있다면 자생적으로 제도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좌파들이 그 제도가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사족을 부쳐 이 제도를 옹호한다면 그것은 억지주장일 뿐이다. 이 세상에 시장과정의 지식처리 과정보다 더 현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 보를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자의 경영참여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제도의 경쟁에 맡겼어야 한다.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절차로서의 경쟁은 제도의 경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경쟁은 비효율적인 제도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해 주는 발견적 절차이다. 시장의 진화과정은 새로운 제도를 혁신하고 기존의 것과 경쟁하는 과정 속에서 비효율적인 제도를 걸러내는 과정(도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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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내용>
1) 엄격히 말해서 단체협약은 사용자연맹의 구성원인 사용자에게만 구속적이다. 그러나 사용자는 집단협약을 피하기 위해 사용자연맹을 탈퇴할 수 없다. 단체협약은 어느 일방에 의해 취소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계약으로 교체될 때까지 유효하다.
2) 독일 세법의 특징은 주식회사를 개인사업자나 합명회사 또는 자영업자에 비해 유리하게 만들었다. 자본회사의 사내유보이윤을 세법상 우대했다.
"복지병"의 골은 깊어만 가고,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한때 "전차군단 독일"의 상징이었던 대(大)철강그룹 티센크룹(ThyssenKrupp)은 발행 채권이 "정크(투기등급)" 판정을 받는 수모를 당할 정도다.
독일의 쇠락은 "지하경제"의 급속한 번식에서도 확인됐다.
베를린 샤로텐부르크에 살고 있는 전직 교사 볼프강 슈톨(Wolfgang Stoll)씨.그는 최근 분양받은 집을 임대하기 위해 바닥재를 새로 깔면서 "슈바르츠아르바이터(Schwarzarbeiter)"를 고용했다.
슈바르츠아르바이터는 직역하면 "검은 노동자(black worker)". 의료보험 실업보험 등 각종 사회부담금과 과중한 세금을 피해 "암(暗)시장"에서 일하는 불법 노동자를 독일인들은 검은 노동자라고 부른다.
폴란드 터키 등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순혈 독일인 실업자들도 암시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월급의 60~70%에 달하는 실업수당을 타먹으면서 몰래 부수입을 올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기업들도 공공연히 암시장 노동자를 채용하고 있다.
30~40명의 단속반원들이 건설현장에 들이닥쳐 불법 근로자들을 색출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건설근로자의 경우 정상적으로는 시간당 평균 15유로(1만8천9백원)를 지급해야 하지만 암시장 노동자들을 고용하면 절반인 7유로(9천4백50원)면 된다.
"불법"에 대한 유혹이 클 수 밖에 없다.
잘짜여진 복지국가 독일을 떠받쳐온 기둥들이 밑둥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세계 최초로 국민연금 제도를 도입하고 가장 완벽한 사회복지 제도를 시행해 전세계 노동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러나 과중한 세금과 사회부담금,노조 중심의 기업문화는 독일을 서서히 지하경제로 지탱되는 "노쇠한 대국"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