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발자국을 따라간 시간: 어느 검사원의 인도 체류기

 

인도라는 거대한 대륙을 마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국경을 넘는 일을 넘어 전혀 다른 시공간의 문을 여고 들어서는 것과 같았다. 지난 7달 반 동안 마하라슈트라주의 중심, 푸네(Pune)에 상주하며 내가 마주한 인도는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함 그 자체였다.

 

흔히 인도를 '눈먼 자들이 만지는 코끼리'에 비유하곤 한다. 누군가는 다리를, 누군가는 코를 만지며 각자의 인도를 말한다. 이방인으로서 숨 가쁘게 달려온 지금, 나 역시 그 거대한 코끼리의 뒷다리 한쪽을 겨우 살짝 만져보고만 기분이다. 그러나 그 미미한 접촉만으로도 전해져 온 대지의 진동은 내 삶의 지평을 넓히기에 충분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낯선 공기와 혼잡한 거리는 거대한 벽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혼돈 속에서도 고유한 질서와 삶의 생동감이 요동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 이 머나먼 이국땅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이토록 묵직하게 차지하게 되었을까. 다행히 이 낯선 여정에는 외로움을 나눌 좋은 동반자가 있었다. 주말마다 동료 최 부장과 함께 푸네 시내와 그 너머의 광활한 대지로 나가 곳곳을 둘러보던 시간들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아가 칸 궁전에 자리한 간디 박물관을 비롯해 푸네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며 인도의 깊은 역사와 숨결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시간을 내어 찾아간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 같은 세계적인 명소들은 온몸을 압도하는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집념과 신앙이 거대한 바위를 깎아내어 창조한 그 장엄한 신비 앞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옛날 먼 길을 떠나온 불교문화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결국 우리 석굴암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전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명의 거대한 뿌리가 시공간을 초월해 고국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이국땅에서의 여정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주었다.

 

주말의 여정은 웅장한 역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지 위로 우뚝 솟은 수많은 산정의 요새들을 숨 가쁘게 올라서며, 발아래 펼쳐지는 인도의 광활한 자연과 그 속에 녹아든 문화를 온전히 접할 수 있었다. 척박한 듯하면서도 끝없이 품을 내어주는 인도의 자연을 마주할 때마다, 이 낯선 땅이 나에게 허락해 준 이 특별한 기회에 가슴 깊이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주말에는 활기 넘치는 피닉스몰을 찾아 쇼핑을 즐기며 이국적인 일상에 녹아들기도 했다. 미식의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정통 인도식부터 시작해 세련된 유럽 요리, 그리고 고향의 향수를 달래주는 아시아 식당까지 다양한 맛집들을 두루 섭렵하며 푸네에서의 주말을 풍성하게 채워나갈 수 있었다. 이 역동적인 도시에서 최 부장과 함께 보낸 주말의 시간들은 내가 만진 코끼리의 뒷다리를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여 주었다.

 

물론 평일의 일과가 끝나고,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보내는 이국땅의 밤은 여전히 깊고 고요했다. 문득문득 밀려오는 그리움은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독의 시간은 나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건강을 위해 묵묵히 체력을 단련하며 나만의 루틴을 지켜가던 평일의 밤들. 그 외로움의 뒷면에는 기술자로서 현장에서 거둔 성취와, 이 거대한 문명 속에서 홀로 서서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채워나갔다는 나름의 보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소중함은 더욱 애틋해졌고, 고독을 보람으로 바꾸어내는 삶의 무게는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출장과 파견을 다녔지만, 대개는 삭막한 호텔이나 현장의 공동 숙소를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푸네 파견에서는 운 좋게도 한인이 운영하는 '한강리조트'에서 머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타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삼시세끼를 정성 가득한 한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덕분에, 길고 지난한 인도 파견 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 여느 호텔의 기계적인 서비스와는 달리, 가족처럼 따뜻하게 챙겨주신 한인 사장님 내외분들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어느새 정이 듬뿍 든 현지 종업원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받은 보살핌과 도움은 낯선 이국땅에서 느낀 가장 큰 따스함이자 감사한 일이었다.

 

사실 내가 이 뜨거운 대지 위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 진짜 이유는 현장에 있었다. 푸네에 위치한 Enpro 사에서 진행되는 'Chemical Injection Package(약품 주입 패키지)' 제작 프로젝트의 상주 검사원(Resident Inspector)으로서, 완벽한 품질을 확보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엄중한 임무였다. 플랜트의 혈류를 담당할 핵심 설비이기에 도면과 절차서의 수치 하나, 용접선 한 줄도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본사와 현지 엔지니어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조율하며 기술적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타협 없는 품질 기준을 관철시키고,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정밀 설비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기술자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자 긍지였다. 주말의 탐방이 인도의 정신을 만나는 시간이었다면, 평일의 Enpro 현장은 인도의 역동적인 미래와 나의 땀방울이 교차하는 치열한 삶의 장이었다.

 

이제 지난 7개월 반의 시간을 돌아보며, 내 안에서 서서히 굳은살처럼 박인 삶의 지혜를 느낀다. 인도는 나에게 서두르지 않는 법을, 눈앞의 혼돈 너머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완벽히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숙소 식구들의 따뜻한 정과 최 부장과 함께 거닐었던 푸네의 거리,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인도의 단면들은 내 삶에 잊지 못할 선명한 지문으로 남았다.

 

인도에서의 여정이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지금, 나는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그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배움과 인연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푸네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보람과 감사로 가꾸어낸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인생의 뜨거운 한 장을 함께 채워준 동료와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준 이들, 그리고 이 거대한 대륙에게 가만히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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