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전성기와 그 이후, 사우디에서 돌아본 한국 플랜트 산업
요즘 사우디에서 장을 보러 나가면 나를 보고 “니하오”라고 부르는 상인의 목소리가 부쩍 자주 들린다. 공항에서도 중국인 여행객이 예전보다 눈에 많이 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시장을 지나가는 내게 상인들은 “갈치 있어요!”, “조개 있어요!” 하고 한국말로 외치곤 했다.
그때 들었던 한국말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중동의 정유공장과 가스플랜트에서 일하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한국의 엔지니어링·건설사 여러 곳이 한 정유공장의 주요 설비를 나누어 맡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대형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소식도, 몇 해 뒤 같은 사업에서 큰 손실이 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두 장면 모두 내가 기억하는 한국 EPC의 중동 이야기다.

2012년에 발표된 ENR 집계에서 2011년 중동 지역 매출 상위 10곳 가운데 한국 기업은 네 곳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이 3위, 현대건설이 4위, GS건설이 5위, 대림산업이 10위였다. 해외건설협회의 당시 분석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매출은 집계 대상 중동 매출의 20.7%로 국가별 1위였다.
이듬해 발표한 2013년판(2012년 매출)에서는 삼성엔지니어링·현대건설·대림산업이 1~3위였고, GS건설은 8위, SK건설은 9위였다.
이 순위는 석유·가스에 한정하지 않은 중동 지역 해외건설 매출 기준이다.

당시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업이 UAE 루와이스(Ruwais) 정유공장 증설이다.
2010년 ADNOC 계열 정유사 TAKREER는 한국 기업 네 곳과 주요 5개 패키지에 대해 총 96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SK건설은 원유 증류와 연계 공정, GS건설은 잔사유 유동접촉분해(RFCC)와 해상시설, 삼성엔지니어링은 유틸리티와 부대시설, 대우건설은 저장탱크와 연결 배관을 맡았다. 핵심 정제 공정에서 저장·출하 시설까지, 한 정유공장 증설의 주요 범위를 한국 업체들이 설계하고 건설했다
수주 확대의 후유증은 2013년 전후부터 실적에 드러났다.
GS건설은 2013년 약 9,400억 원, 삼성엔지니어링은 2015년 약 1조 4,543억 원의 연결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두 수치는 각 회사 전체의 연간 실적이다.
사우디 현장에서 비용이 늘어난 경위는 사업마다 달랐다.
나는 이 시기의 손실을 수주 규모와 사업의 복잡성이 커지는 속도를 회사의 프로젝트 관리 체계가 따라가지 못한 결과로 본다. 프로젝트 관리는 입찰 단계부터 시작된다. 약속할 공기를 기준으로 인력과 하도급업체를 실제로 확보할 수 있는지 검증하고, 설계·조달·시공이 맞물리는 일정을 짜고, 차질이 발생하면 추가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 계약에서 정하는 일이다.
일괄총액(Lump Sum) 계약은 합의한 공사 범위의 계약금액을 총액으로 정한다. 그 범위에서 원가가 예상보다 늘더라도 계약금액이 자동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추가 비용을 계약 변경으로 회수할 근거가 없다면, 그 차이는 EPC사의 이익을 줄이거나 손실로 이어진다. 샤이바와 와싯에서 공개된 손실 경위는 회사가 수주할 때 감수한 위험과 현장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자원을 돌아보게 한다.
SK건설은 루와이스 이전부터 쿠웨이트에서 기반을 쌓았다.
2005년 쿠웨이트석유공사(KOC)의 약 12억 달러 규모 집유·가압시설 개보수 사업을 수주했고, 별도의 사브리야(Sabriyah) 집유시설 복구 공사에서는 2010년 계획보다 약 6개월 앞서 생산을 시작했다. 사우디에서는 얀부(Yanbu) 수출 정유공장의 원유 증류설비와 자잔(Jazan) 정유공장 공사에 참여했고, 와싯 가스 개발에서는 육상 EPC 패키지 네 개 중 세 개를 맡았다. 이후 와싯 등에서 손실이 발생했고, 회사는 2021년 SK에코플랜트로 사명을 바꿔 환경·신에너지 사업을 확대했다. 최근에는 반도체·AI 인프라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SK건설이 석유·가스 EPC 신규 사업을 접기 시작할 무렵, 내 기억에 당시 경영진은 임직원의 역량과 책임을 문제 삼았다.
내가 현장에서 본 동료들은 이미 정해진 가격과 공기, 주어진 인력 안에서 어떻게든 공사를 마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자리였다면, 그 가격과 공기로 계약을 승인한 판단은 타당했는지, 회사는 약속을 지킬 인력과 자원을 마련했는지도 함께 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회사가 더 이상의 손실을 감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신규 사업을 접기로 한 결정은 내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기게 된 계기였다. 회사에는 사업 방향을 바꾼 결정이었고, 내게는 일터를 옮기게 한 결정이었다
중동 사업의 변화는 회사마다 달랐다. 삼성E&A와 GS건설은 2024년 사우디 아람코의 파딜리(Fadhili) 가스처리시설 증설 사업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GS건설이 맡은 황 회수설비 EPC는 약 12억 2천만 달러 규모였다.
삼성E&A는 2026년 사우디 SABIC Agri-Nutrients의 SAN-7 비료 플랜트 단독 EPC 계약도 발표했다.
현대건설은 사우디 SATORP 정유공장과 연계된 아미랄(Amiral) 석유화학 사업의 주요 패키지를 맡았다.
㈜한화 건설부문은 사우디 자잔 정유 프로젝트의 해양터미널 공사에 참여했고, 이라크에서는 주택과 기반시설을 짓는 비스마야(Bismayah) 신도시를 맡았다. 비스마야는 공사대금 미지급으로 2022년 중단됐고, 2024년 공사 재개를 위한 변경계약이 체결됐다.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는 2026년 10월 한화에 지급할 금액 중 1억 1,100만 달러를 먼저 송금했다고 발표했다.
중견 플랜트 EPC사인 SGC E&C는 사우디에서 에틸렌·프로필렌, 이소프로필알코올, 에틸렌초산비닐 생산설비를 잇달아 수주했다. 알와하(Al-Waha) 사업에서는 한국 본사가 설계·조달을, 사우디 법인이 시공을 맡았다.
ENR 중동 지역 매출 순위에서 인도의 Larsen & Toubro(L&T)는 2024년판과 2025년판 모두 1위였다.
2025년판에서 중국의 POWERCHINA는 2위, China Petroleum Engineering은 7위였고, 한국의 현대건설과 삼성물산은 각각 6위와 9위였다.
POWERCHINA는 2026년판에서도 중동 2위를 유지했다고 발표했다.
이 순위에는 발전과 인프라 등 여러 공종이 포함된다. 미국의 McDermott는 4위, 프랑스의 Technip Energies는 5위, 일본의 JGC는 8위였다.
한국·미국·유럽·일본 업체도 상위권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석유·가스 EPC의 구도를 보려면 공종을 좁힌 자료를 따로 봐야 한다.
L&T의 강점은 자체 설계·조달 역량을 모듈 제작과 해상 설치·시운전까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하지라(Hazira)와 카투팔리(Kattupalli), 오만의 소하르(Sohar)에 제작 거점을 두고 해상 플랫폼 구조물과 대형 공정 모듈을 생산한다.
여러 작업을 현장에 집중시키는 대신 제작장에서 모듈을 미리 조립하고, 운송과 설치를 전체 일정에 맞춰 계획할 수 있는 기반이다.
사우디 자푸라(Jafurah)에서는 가스 압축설비 1단계와 반출 배관의 준공·시운전 실적을 쌓았다.
카타르에서는 2025년 노스필드(North Field) 해상 압축 COMP 4를 수주했고, 사우디 줄루프(Zuluf) 해상 유전 재개발에서는 기존 플랫폼 교체와 신규 연결 플랫폼, 배관 및 개조 공사를 맡았다. 육상 가스시설과 해상 설비 양쪽에서 쌓은 수행 실적과 제작 기반이 대형 패키지를 맡을 수 있는 배경이다.
중국의 강점은 여러 기업이 서로 다른 공종에서 대형 공사를 수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POWERCHINA가 보여주는 발전·인프라 분야의 규모와 Sinopec 계열사나 CPECC가 보여주는 석유·가스 분야의 역량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의 사업보고서에는 중국 내 장거리 가스관과 LNG 터미널 반출 배관의 완공 실적, 사우디·UAE의 가스 배관 계약이 함께 실려 있다.
사우디에서는 Sinopec 계열 서비스사가 아람코 간선 가스망(Master Gas System) 3단계 일부 구간의 조달·시공을 약 11억 달러에 계약했다.
UAE에서는 CPECC가 2026년 ADNOC Onshore의 사우스이스트 유전군 부대시설 사업에서 EPC 주계약자로 공사를 수행하고 하도급을 발주했다.
장거리 배관 시공과 유전 부대시설의 통합 EPC는 요구하는 역량이 다르다. 중국 업체들의 입지는 서로 다른 종류의 공사를 맡는 기업들이 함께 늘어나면서 넓어지고 있다.
2013년 MEED의 중동·북아프리카(MENA) 석유·가스·석유화학 수행 중 계약액 순위에서는 삼성엔지니어링이 1위, 대림산업이 3위, SK건설이 4위, GS건설이 5위, 현대건설이 8위였다. 같은 표에서 이탈리아 Saipem은 6위, 일본 JGC는 9위, 미국 McDermott는 10위였다.
당시 한국 EPC의 위상은 여러 회사가 한꺼번에 상위권에 올랐다는 데서 드러난다.
2024년 MEED의 걸프협력회의(GCC) 석유·가스 순위에서는 이탈리아 Saipem이 1위, 미국 McDermott가 2위, 삼성E&A가 3위였다.
중국 Sinopec은 7위, 인도 L&T는 8위, 일본 JGC는 9위였다. 이 순위는 2024년에 수주한 사업 가운데 보고서 집계 시점에 수행 중인 계약으로 범위를 좁혔다.
지역과 공종, 포함한 계약의 범위가 2013년 표와 다르므로 두 표의 순위 차이로 국가별 시장점유율이나 하락 폭을 계산할 수 없다.

2025년 MEED의 MENA 석유·가스·석유화학 EPC 집계에서도 이탈리아 Saipem이 수행 중 계약액 269억 달러로 1위, 인도 L&T가 254억 달러로 2위였다.
L&T가 대형 계약을 쌓아온 흐름은 확인된다. 중국 업체 역시 사우디 배관과 UAE 유전 부대시설 등에서 주계약자로 입지를 넓혔다.
동시에 Saipem·McDermott·JGC 같은 기존 업체들도 주요 순위에 올라 있고, 삼성E&A는 GCC 석유·가스 집계에서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전성기처럼 여러 회사가 동시에 최상위권에 오르던 구도에서 벗어났다.
다만 회사마다 사업 방향이 달라졌고, 삼성E&A·GS건설·현대건설 등은 여전히 중동의 대형 공정 패키지에 참여한다.
L&T가 확보한 육상·해상 계약과 모듈 제작 기반, 중국 업체들이 쌓은 배관·유전설비 실적을 보면 두 나라의 주요 업체가 당분간 유력한 경쟁자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순위는 대형 패키지의 발주 시점과 수주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요즘도 사우디 시장을 지나다 보면 “갈치 있어요, 조개 있어요” 하고 나를 부르던 상인들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른다.
그 시절의 기억에는 수주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동료들도 있고, 공기가 밀린 현장에서 어떻게든 일을 마치려던 동료들도 있다.
이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가끔은 그때 사우디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그립다.